아키인터뷰. BEAR 매거진

시작하는 곳, 기억

 

인생도서관의 김우성 대표는 우주가 바로 거대한 인생도서관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하는 행위가 우주 어딘가에 모두 쌓이고 있을거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인생도서관을 둘러보니 합정동에 자리잡은 이 작은 공간이 광활한 우주보다 훨씬 더 깊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에서는 기억을 그저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뒤에 쌓아두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알지 못할 것들을, 돌아보면 알 수 있다. 인생도서관은 단순히 기억을 모아두고 추억을 곱씹는 곳이 아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곳이다.

글 한성옥 사진 서상민

 

인생도서관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궁금합니다.

참 어려운 질문인데요, 요즘은 ‘성찰 문화 공간’ ‘성찰의 시작점’이라 설명하고 있어요. 주체적인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삶을 성찰하고 표현하고 교류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실험장 혹은 놀이터죠. 나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가지 세팅을 제공하고 스스로 정리할 수 있게 도와주고 아카이브도 해주고 있습니다.

 

원래 건축가였다고 들었습니다. 건축을 하다가 인생도서관을 만든 계기가 있나요?

자연스럽게 하게 됐어요. 저는 지금도 건축 일을 하고 있는데 주로 컨셉을 잡거나 전략을 짜는 일을 해요. 이런 컨설팅 업무를 하면서 공간 프로젝트나 콘텐츠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까 인생이라는 것도 하나의 프로젝트처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 지구에서 우리 모두가 수행하는 공통의 프로젝트인 거죠. 평상시 컨설팅을 하는 방식으로 인생이라는 프로젝트를 한번 정리하고 분석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생도서관에서는 미트릭스와 위트릭스라는 툴킷을 사용하고 있어요. 이 툴킷으로 어떻게 인생을 돌아볼 수 있나요?
툴킷은 여섯 개 트랙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각각의 트랙에 해당하는 내용을 태어난 해부터 쭉 적어나가는 거예요. 적고 나면 그걸 보면서 저희가 질문을 드리기도 하고 직접 책을 보면서 채워나가기도 하며 현재까지의 인생을 정리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거죠. 미트릭스는 이 툴킷을 혼자 작성하는 거고 위트릭스는 커플이나 가족 등 여러 명이 한 단위가 돼서 하는 거 예요. 처음에는 인생을 책으로 쓰게 하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책을 바로 쓸 수 없는 경우가 꽤 많아서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툴킷을 만들었죠.

 

사람마다 인생이 다 다를 텐데 정해진 트랙으로 인생을 돌아보는 게 유효한 방법일까요?
같은 구조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도 저마다 공간을 다르게 쓰잖아요. 제가 보기엔 사람들 이 어떤 공통의 틀 안에서 서로의 독특함을 표현하며 사는 것 같아요.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맥락은 물론 다 다르지만 공통된 구조를 어느 정도 규정해놓고 그 안에서 서로 다름을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런 구조를 먼저 설계한 거죠. 내 성격이나 내가 사회에 서 맡은 여러 가지 역할 같은 개인 정보를 적는 미인포, 공간 환경, 욕망을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인 라이프스타일, 사람들, 이슈나 키워드를 정리하는 개념환경, 노동을 포함해서 내가 생산해내거나 표현하는 것들에 대해 쓰는 워크, 이렇게 여섯 가지로요.

 

인생을 정리해보는 일이 왜 필요할까요?
인생을 혼자 정리하면서 얻는 것이 굉장히 많아요. 나는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점검해보고 정의도 내려보고 내 인생의 맥락도 파악해보면 스스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죠. 왜, 죽을 때가 되면 주마등처럼 눈앞에 인생이 한꺼번에 지나간다고 하잖아요. 그 ‘한꺼번에’를 살아 있을 때 보게 하는 거죠. 인생을 처음부터 현재까지, 현재에서 미래까지 한눈에 보게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해요.

 

인생을 한눈에 보는 게 가능한가요?
툴킷을 하루 만에 다 쓸 수가 없으니까 벽에 붙여놓거든요. 그러면 매일 이걸 쳐다보게 되잖아요. 보고 있으면 시작점부터 현재, 현재부터 미래까지의 어떤 연결성들을 발견하게 되죠.

 

인생을 풀어놓으면 무척 복잡할 것 같은데 사람들이 연결성을 잘 발견하나요?
생각보다 되게 잘 찾아요. 이상하게 나이 드신 분들이 굉장히 빨리 찾으시더라고요. 특히 어렸을 때 사건들을 잘 기억해내세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평생 영어 공부가 숙제 같은 거 였는데 이걸 쓰다 보니까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자신이 영어를 쓰면 엄청 좋아했다는 걸 떠올리게 되는 거예요. 이게 자기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비롯된 욕망이라는 걸 깨닫는 거죠. 사실 다른 사람의 일이면 원인이 이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할 것도 자기 일이면 그렇 게 생각해보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이걸 적다 보면 나한테 영향을 준 내적 요인이나 외적 요인을 알게 되죠.

 

기억을 연결해서 봐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기억을 레고 블록처럼 쌓고 그것들 사이를 오가는 게 아니라 어떤 특정 시점만 반복해서 돌아보는 분이 꽤 많아요. 하나의 레고 블록만 계속 보고, 그 주변의 일부만 봐요. 현재의 나와 그 특정한 기억 사이만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거죠. 저는 거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무한 루프에 빠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돌아버리거든요. 저는 하나의 시점에 집착하지 말고 그 기억을 확장해나가고, 연결해보고, 대화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기억과 대화한다고요?
정확히 말하면 기억이라는 추상적인 것과 대화하는 건 아니에요. 사람들이 보통은 기억 안에 있는 내 감정이나 특정 상황만 꺼내서 계속 리플레이하는데, 그러지 말고 아예 그 안에 뛰어들거나 다른 기억들을 계속 연결해서 그 일이 어떻게 발생한 건지, 어떻게 계속 커지는지 알아봤으면 좋겠어요. 그때 상황에서 나를 꺼내어 말을 걸어보는 거예요. 그때의 나와 대화를 하고 그 주변의 맥락들을 연결해보면 내 삶, 내 욕망 그리고 그 순간에 이어져 있던 다른 것들을 되게 잘 볼 수 있어요. 내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여기로 왔구나, 라는 걸 발견할 수 있죠. 하나가 아니라 전체를 펼쳐놓고 보는 여행을 떠나는 거죠.

 

그런 성찰을 통해 인생이 정말 달라질까요?
유학 가기 전에 여기로 진단받으러 온 분이 있어요. 지금 마흔일곱이고 아버지 회사를 물려 받기로 해서 MBA 유학을 갈 예정인데 그냥 한 시간짜리 진단이나 한번 받아보자 하고 가볍게 온 분이었죠. 그런데 지금 석 달째 코칭을 받고 있어요. 유학은 취소됐고요. 원래는 피아노를 치고 그림을 그리면서 평생 살고 싶었는데 지금 왜 이러고 있을까? 코칭 한 달 반 만에 이걸 생각하게 된 거예요. 지금은 연습실을 준비 중이에요. 연습실을 사업적으로 하면 너무 힘드니까 그냥 매일 한 곡씩 연습해서 발표할 수 있는, 작지만 스테이지가 있는 연습실을 만들고, 스스로 그 공간을 운영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지금 가고 있어요. 그런데 집에서는 아직도 유학 준비 중인 줄 알아요. 사실 쉰이 다 돼가는 사람인데 아버지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은 아직도 풀어야 할 지점이 많은 거죠. 하지만 방향은 선회한 거예요.

 

미래가 완전히 바뀌어버렸네요.
미래에 대한 시나리오도 맥락적인 거거든요. 사실 내가 지금 하는 것을 보면 내가 어떻게 될 지 알 수 있잖아요. 내가 타고난 게 무엇이고, 내가 어떻게 행동했고, 누가 나한테 영향을 줬는지 돌아보면 이러이러한 것들이 누적되고 반복되면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구나,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아가겠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하게 되죠. 내 삶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 꺼번에 보고 그 맥락을 파악하면 그 다음을 깊이 성찰할 수 있는 시작점은 되는 거예요.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지만 전체 맥락과 구조를 스스로 이해하는 게 굉장히 중요 해요.

 

사실 인생도서관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열람할 수 있는 공공 도서관 형태를 상상 했는데 자신의 인생을 성찰해보는 곳이네요.
그게 제가 평생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예요. 저는 죽을 때까지 인생도서관을 운영할 생각이 에요. 인생도서관 설계는 다 끝났는데 구현이 아직 다 안 됐거든요. 말씀하신 기능이 언제쯤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하다 보면 생기긴 생길 거예요. 지금은 먼저 툴킷으로 나라는 사람에 대해 파악하고, 그 다음 단계인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라이프를 콘텐츠화하는 걸 도와드리고 있어요. 메이크 프로그램, 미디어로 콘텐츠를 만들어 나 자신을 표현하는 프로그램, 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한 코칭·컨설팅 프로그램, 이 세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서 쌓인 콘텐츠들을 통합하고 열람할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를 준비 중이에요. 내 인생을 책으로 바로 만드는 기능도 넣을 거고요. 완성되면 인생을 기반으로 한 여러가지 콘텐츠를 살 수도 있고 공개 여부에 따라서 볼 수도 있겠죠. 지금 이 공간이 정보 아카이브라면 콘텐츠 아카이브가 생기는 거예요. 지금보다 좀 더 공간이 커지면 미디어룸이나 도서열람실처럼 열람도 할 수 있을 거고요.

 

대표님은 이미 미래를 다 그려놓았네요.
네. 이번 인생은 인생도서관이라는 프로젝트를 하는 시간 같아요. 이걸 하기 전에는 뭐 IT 벤처니 컨설팅이니 건축 설계 사무소니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했는데, 그걸 다 넣으니까 인생도서관이 나오더라고요. 이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되게 큰 건데 그게 없어져서 좋아요. 지금 삶에서 큰 고민은 해 결된 거예요. 저는 망해도 이걸 할 거거든요.

 

망해도 인생도서관을 한다고요?
네. 제가 이 말 하면 사람들은 다 농담이라고 생각하던데 전혀 그렇지 않고요, 저는 노숙자가 되어서도 이 일을 할 겁니다.

 

노숙자가 되어서 어떻게 인생도서관을 운영할 수 있나요?
일단 친구를 찾아가서 부탁할 거예요. 내가 이 일을 계속해야 되는데 지금은 돈이 없어서 노트북을 못 사니까 노트북 하나만 구해달라고. 밥도 그동안 알던 사람들에게 다 전화해서 날짜를 정해 나한테 밥을 먹여라, 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할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대한 글을 쓰든 툴킷을 만들든 하겠죠. 제 머릿속에 있는 것들 중에 아직 물질화되지 않은 게 많기 때문에 계속 만들어야 돼요. 저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없는데 인생도서관은 할 일이 많으니까 그냥 이 일을 계속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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