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강원도의 힘 – 내면화된 일상적 권력구조의 해체

April 26, 1998
April 26, 1998 ARCHIE

Q : 벗어날 수 없는 공간으로의 탈주

혹시 서울의 1000만 인구가 갑작스레 어디론가 훌쩍 떠날 맘이 생기게 할 수 있다면, 그 중 800만은 강원도 설악산 – 강릉 – 동해 바다에서 만나는 걸 보게 되지나 않을까? 수학여행 하면 우리나라 중고생의 대부분이 죄다 경주에 안 가면 큰일이라도 날듯이 그 고도가 버글대는 것처럼.
‘강원도의 힘’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이렇듯 무의식의 차원에서 지배하는 내면화된 일상적 도식의 힘을 지독하도록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영화이다. 지독히 평범한 어찌보면 참으로 상투적인 내러티브안에서 말이다.
유부남 시간강사와 여대생이 사랑에 빠진다. 예정된 이별을 하고, 이별을 했으니 추억을 안고 여행을 떠난다. 물론 강원도로(!?) ― 그러나, 그게 경주건 부산이건 뭐 그리 대수겠나… – 같은 시·공간에서 그들은 만나지 못하고 스친다. 감독은 그들의 이러한 여행을 따라 현실의 닫혀진 대응관계들을 예리하지만 아주 무덤덤하게 쳐다보고 있다. 이러한 응시는 관객들로 하여금 끓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탈주는 가능한지? 우리는 정말 탈주를 원하고 있는 걸까?”를.

영화가 시작되면 등장인물들은 끓임없이 물어댄다.
“어디가세요?”(경찰관) “너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니?”(산 위의 물고기에게 지숙) “갑시다.어디로 가는데?”(술취한 지숙) 시를 읽을 때도 “나는 가리라 머-얼-리…”(미선) 노래조차도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지숙일행) 하고 불러댄다. 그러나,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대답하는 이는 물론 아무도 없다. Escher의 저 그림(Reptiles, M.C.Escher 1943. lithograph)처럼 결국 제자리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영화의 광고를 보고 “불륜? 이거 뻔한 멜로 드라마?” “여행? 로드무비?”하는 정도의 도식적 예상으로 극장을 찾은 관객이라면, 섹시한 여자의 모습도, 역동적인 트랙킹 샷도, 여정에 덧붙은 장엄한 자연조차도 볼 수가 없는 이 영화에 적응못한채 2가지 형용사중의 하나를 떠올리게 될 지 모른다. ‘심각한’ ‘지루한’! 그러나, 어깨에 힘준 엄숙함이 아니라 그저 담담히 일상의 단면들을 충실하게 담아내는 이 영화를 뭐 지나치게 심각히 볼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이야기와 장르구조의 관습 그리고 직선적 시간구조를 조금씩 해체해 가면서 존재의 일관적 해석가능성에 의문을 던지는 이런 영화를 보노라면, 지루함으로 졸리기 보단 누가 내 뒤통수에 카메라라도 들이댄 것처럼 정신이 오싹 드는 것은, 나의 개인적 영화 취향 때문만 일까? 또한 이 모든 것들이 독특한 엮음의 형식을 통해서, 분화된 일상 속의 균열들을 낯설게 드러내면서도, 어떠한 담론적 틀에도 고착되지 않고 그 사이에서 자유로운 유희를 즐기려는 영민한 감독의 지독히 치밀한 전략이 아닐까 라는 의심마저 들게 되면 더욱 소름끼치는, 오히려 무서운 영화?

1.지숙 – 가질 수 있는 것 vs. 가질 수 없는 것

야간열차에서 서서 졸고있는 지숙의 모습과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앳되고 안-섹시한 몸매를 지닌 평범한 모습의 그녀는, 항상 일행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따라 걷거나, 친구들이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놀 때도 저만치 떨어져 모래에 그림을 그리고 앉아있다. 그녀는 이별을 정리하는 거나, 삶을 관조하는 것 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름대로 평온하고 즐거워 보이던 그들의 여정은, 평소 가슴속에 숨겨왔던 적대감을 술좌석에서 드러내면서 갑자기 반전된다. (술을 마시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이 장면 역시 너무나 흔한 우리주변의 일상이 아니던가? 왜 안취하면 대화가 안되는 걸까… 쩝)
“넌 살아가면서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게 보이지 않냐?… 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가지려고 노력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은 포기하려고 노력해. 그래서 어떤 땐 너무나 아프다… 난 내 꿈을 위해서 희생해왔어. 그래서 아프다.” (지숙)
“네가 말하는 꿈이라는 게 유부남이랑 사귀는 거니? … 넌 하나도 특별한 거 없어. 다른 사람하고 똑같아. 엄청 상투적이란 말이야.”(미선)
어쨋든 술이라는 일탈을 통해 지숙의 지숙과 미선의 지숙의 분열이 시작되고, 이후에 나오는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만난 여자 중에 가장 성숙했다”던 상권의 지숙을 통해 또다시 분열된 대상을 드러낸다. 그러나, 다음날 술이 깨고나면 그들은 또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웃으며 미안해하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가질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면서 나름의 꿈을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결국은 다 똑같은 일상인의 모습으로.

2.상권 – 기다림. “조금만 더 긴 호흡으로 기다리자.” So what?

“사랑은 끝났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나약한 지식인 상권.(전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등장했던 3류 소설가의 또다른 모습처럼 보이는) 무미건조한 서울생활을 보내던 상권은 후배 재완과 갑작스레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생활의 무미건조함은 장소의 문제는 아니다. 한 부부가 산 정상 벼랑 끝에 서서 경치를 감상하던 – 이 영화에서 가장 아찔한 느낌을 주는 – 장면에서조차 그들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앉아있다. “한발짝이면 아차인데… 도데체 왜들저러는지 이해가 안간다”며, 결코 도시공간에 속한 그들의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혼자서는 결코 떠나지 않을 그들의 여행은 그래서, 항상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늘 핸드폰은 곁에 끼고, 새로 산 신발끈을 확인해 가면서, 케이블카를 탈때도 40배의 안정성을 확인해보고, 밤에는 서울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술집으로 이어진다. 마지못해 하게 되는 술집 접대부와의 섹스조차 그래서 너무나 건조하다. 여행에서의 특별한 모험이란 고작 술집 갈 때 봉고차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여정에서 일상의 파격을 기대하던 관객들은 돌발성이 오히려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게된다. 영화에서 가장 관객을 놀라게 하는 장면은, 상권가족의 외출을 멀리서 지켜보던 화면 안으로 느닷없이 뛰어들어온 자동차였다.
여행의 끝 무렵, 비행장에서 “기다려 봐야 압니다.”하던 안내원의 반복적인 대답에, 상권과 재완은 낙산사에 잠시 들르게 된다. 그곳에서 지숙의 흔적을 발견한 상권은, 서울로 오자 지숙의 아파트로 찾아가 계단실 벽에 메모를 남긴다. “조금만 더 긴 호흡으로 기다리자.” 그러나, SO What? 평생 기다려봐라!

3.사랑 or Funny Power Game? – “사랑해” “나도 좀 살아야겠어요”

일상의 힘은 집단적 무의식에 작용, 상투적 행위를 통하여 개인간의 관계에 있어 암묵적인 힘의 행사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처음으로 홀로 여행을 떠난 지숙은 경찰관에게 차안에서 갑작스레 화를 폭발시킴으로서 그를 주눅들게 만들고, 이후 그녀는 그에게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꼭 전임교수가 되겠다는 의지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권은, 조니워커 블루를 사들고 ‘의리’있다는 김 교수를 찾아간다. 그건 그저 그래야 하는 게 당연하니까 가는 거다. 교수가 준 음료수에 이물질이 있어도 그냥 마셔야되고, 우산을 교수집에 두고 왔어도 밖에서 그냥 돌아선다. 먼저 교수가 된 후배 재완은 “내말 들으라며” 은근히 선배의 위에 군림한다. 일상에선 내색할 수 없던 그의 자존심을 상권은 여행중 술에 잔뜩 취해서 드러낸다. 그러나, 술에서 깨면, 비행기의 하나밖에 없는 좌석을 후배에게 양보할 수밖엔 없다. 후배가 아니라 교수인 그에게.

영화가 거의 끝나 가는데도 어떤 안식을 찾지 못한 관객들은 상권이 처음에 했던 “그녀를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어”라는 말에 일말의 희망을 걸게된다. “그래도 그들의 사랑은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 이었겠지?”라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관객의 기대를, 감독은 종반부에서 여지없이,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뭉개버린다. 여관방 장면에서 우리는 이들이 그렇게도 아파했던 사랑이 일상의 닫힌 系를 순간적으로나마 열어주는 한줄기 빛이 아니라, 상권에게는 그저 권력적인 섹스/유희에 다름 아님을 보게된다. 남자가 “사랑해”(영화에서 한번나오는)라는 말을 할 때는 자신의 동물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렇기에, 상권이 지숙에게 펠라티오를 요구하는 이 장면이, 영화 속에서 그가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장면이며, 결국 그의 사랑이라는 언어가 공허였음을 보여준다. 사랑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상권이 우연스레 얻게된 금붕어 두마리 기르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처음엔 세숫대야에 놓고 정성스레 키우기 시작하지만, 한참을 잊은채 지내다가 영화의 끝자락에선 갑작스레 다시 찾고있다.
감독은 그를 향해 있을지 모를 “일상을 넘어서는 전망의 부족”이라는 비평들의 덧없음을 대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탈주를 향한 어떠한 시도와 욕망으로도 결코 쉽사리 일상系를 벗어날 수 없음을 그는 얘기하고 싶은걸까? 그래서 결국 지숙으로서는 “나도 좀 살아야겠어요” 라며 한탄할 수 밖엔 없는 건지도…..

4.죽음 – 탈주/욕망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마지막은 죽음이다. 영화 전반에 우회적으로 표현되고있는 죽음의 향기는 무엇일까? 우연히 산 속에서 마주친 여자와의 만남을 보며 관객들은 뭔가 새로운 특별한 일이 드디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다. 그러나, 결국 일어날 듯 일어날 듯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 있던 남자 역시 아무일도 없다는 듯 혼자서 서울행 비행기를 탄다. 마치 인간세계로 현현한 일상의 신이 “탈주를 시도한 자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아무렇지도 않게 하늘로 다시 돌아가듯이. 우리는 그 여자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일상은 탈주를 결코 허용하지 않음을, 혹은 탈주욕망은 돌발적 죽음으로서만 가능한 것임을 볼 수있다.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원제: Le Marie de La Coiffeuse)에서 처럼, 진정 탈주를 꿈꾸는 자는 욕망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죽음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걸까?

Q : 왜 홍상수감독의 영화에 주목하는가

영화는 끝이난다. 그러나 일상은 계속된다.
탈주를 꿈꾸는 자! 그는 변신을 욕망하는 자이다. 한 사람과의 사랑에서 다른 사랑을 찾는 것도, 시간강사에서 전임교수가 되는 것도,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것도,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세계로의 도약을 꿈꾸는 것도, IMF사태(?)를 벗어나는 것도. 그러나, 결국 이런 외향적 변화로 이룰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담론 공간에서, 우리는 막연한 진보 혹은 향수에 기대는, 이러한 변신 목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조국 근대화, 새마을 운동, 신토불이, 세계화, IMF시대로 이어지는 지배 담론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처음에는 노골적으로 그리고는 아주 조용히 우리의 무의식으로 숨어들어가 우리의 행동을 동일성의 논리로 지배하고 있다. 더욱 높은 생산성을 위한 지배권력의 논리로.

이 영화의 태도는 이러한 근대적 패러다임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자는 변신에 대한 또다른 목표를 세우는 거나 단순한 체제나 제도의 변화만을 꿈꾸어서는 아니되며, 성급한 마음을 누르고 우선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직시하고 회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역사적 설명을 통한 또 하나의 타입으로의 고착화를 피하면서, 우리가 어떠한 틀에 놓여 있는지, 우리가 느끼는 권력의 안락감의 실체를 한번쯤은 의심해 보는 일. 그리고는 (결국 불가능한 일일런지도 모를) 무의식적 세계관으로 부터의 자유를 꿈꾸는 일이란 과연 어떤 공간에서 가능한 것인지를 탐색하는 것.

홍상수 감독은 일상적 지배체계의 생성이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지도, 상식의 차원을 벗어난 반항적 시각을 제시 하지 않는다. 그의 전략은 일상의 전복이 아니라 현상의 한계가 드러나는 경계지역을 누구보다도 뚜렷이, 지독할 정도로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섣부른 대안적 진실은 결코 말하지 않으며, 그것은 아마 그가 “진리는 절대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영민한 회의주의자이기 때문일거다. 반문을 하나 던져놓고 한발 멀리서 자신이 던져놓은 것을 가지고 싸워대는 중에 조금씩 균열을 드러내는 일상의 모습을 즐기는 듯한 그의 태도는, 현재의 예술계에서 보이는 단순한 낯설게 하기 혹은 그로테스크의 전략만은 아니다. 오히려 보편의 논리와 두눈 똑바로 뜨고 눈싸움 하는 것이다. 현실과 사물에 대한 이러한 예리한 그의 해체 전략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는 언어가 아닌, 직관에 호소하는 영상을 통해서이기에 더욱 효과적으로 느껴진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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