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의 사랑을 만나는 일에 대하여

March 14, 2007
March 14, 2007 ARCHIE

이야기를 듣다 내가 불쑥 첫사랑의 사연을 물었을때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때까지 들었던 그의 이야기는,
20대에 원했던 것은 자신을 찾는 것이었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었다는 것.
그만이 발휘할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자신만의 스토리를 다른 이들에게 들려주기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를,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이유라 믿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될까 두려워하는
한 인간이 살았음직한 그런 이야기였다.

마지막 커피 한모금을 들이키고 담배를 물면서 다시 얘기를 시작하기전, 그는
조심스레 자신의 Filofax 맨 뒤쪽에서
묘한 푸른색의 잉크로 씌여진 예쁜 글씨체의 메모 한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1992년 9월19일 오후 1시10분. 주택은행 신촌점.
들어서자마자 대기인 숫자 ‘4’를 확인하고 대기표를 뽑아든다.
청구서를 쓰고 있는 한쌍의 연인이 옆에 있다.
약간은 우락부락 미련해보이며 방위인 듯한 사내와 귀여우나 조금은 비어보이는 여자.
“빨리 써! 뭐하니!” 투덜대는 남자.
“잠깐만… 얼마써야할지 생각안했단 말이야!” 짜증내는 그녀의 목소리엔 약간의 겁이 섞여있다.
순간 딩동소리에 남자는 고갤 돌려 자신들의 번호임을 확인하고는 더 열받았다.
“넌 대체 왜이리 느려터졌냐. 빨리해! 으이구” 이젠 화를 내는 남자.
“왜 화내구 그래. 얼마써? 내일 일요일이잖아” 울먹이는 여자.
남자 “주택부금은 넣었냐?”
여자 “아니”
남자는 바라만 보고 있다.
협박하는 목소리 “으이구 만원이라도 넣어야지 왜 안내!” 남자
쪼그라드는 “아직 날짜 남았단 말야!” 여자
딩동.
내 번호에 불이 들어왔다. 그 여자가 새치기 한다.
잡지를 뒤적이는 남자.
볼일을 다보고 기다리며 서있는 여자.
남자는 모른는 듯 계속 잡지만 뒤적인다.
참다못해 먼저 나가버리는 여자.
남잔 뒤늦게 고개를 들어 은행안을 둘러보다 스웨터를 벗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다.
나도 볼일을 마치고 후다닥 문을 나선다.
바깥 화단에 예쁘장한 여자가 처절한 표정으로 걸터앉아 있다.
남자는 아직도 안에 있다…
아무것도 아닌 사건으로 너무나 우울한 그들을 보며 난 넓고 깊은 마음을 가진 널 생각한다.
그리곤 행복해한다.
남의 불행에서 나의 행복을 찾다니… 난 참…
못된 아이인가보다.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매일 수첩 한장씩만큼의 마음만은 서로에게 보여주자고
약속했던 커플이 있었다. 그리고 위의 글은
그녀가 그에게 보여준 애틋한 마음들 중 하나다.

이 세상사람들이 모두 그였으면 좋겠다던 그녀였다.
늦은 밤 헤어지고 돌아서도 그가 있고, 버스를 타도 그가 앉아있고,
길을 걷다가도 부딪히는 사람이 그였으면 좋겠다던. 그런 때가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그녀의 세상이 그의 모습과 흔적들로 가득 차버리자,
그의 빈자리를 기다리는 시간조차도 너무 행복해했던, 그런 그녀였다.

가끔씩 행복감은 문득 이유를 알수없는 두려움으로 변하기도 했다.
서로의 존재가 너무 과분한 것은 아닌지,
이 근원을 알 수없는 만족감이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닌지 의심도 해보았지만,
결국 그저 이 순간들이 영원하기만을 기도했다.

물론 그들도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는 다른 이들의 사랑이야기에 감동하며 부러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서로를 만나게되자, 그들은 신께서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정해둔 사랑의 용량을
자신들이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들이 만난 이후로 듣게되는 다른 커플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슬픈 사연이 되어버렸던 것은 아닐까하고 걱정하기도 했다.

누구도, 아무것도 더이상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지자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이 100% 사랑이라고 믿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그렇다고 확신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현실이라고 믿기엔 너무나 많은 우연들이
보란 듯이 그들의 사랑을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Surreal 100% Love!

아주 오랜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그 시절의 사랑이 99%였음을 알게 된다.
너무나 하찮아 보였던 1%의 가능성이
그들을 둘러쌓던, 그 많았던 축복의 우연들을 조금씩 삼키더니
급기야 그들이 감당못할 운명적인 괴물로 변해버렸고,
그녀는 지금 그의 곁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곁에 피신해있으니 말이다.

그는,
지금이라는 시점에 비록 함께가 아니라도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과 추억들은 어딘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깊은 어딘가에, 묻혀있을거라고. 애써 자위한다.
그리고,
그 역시도 다른 누군가와 새로운 사랑을 키워나간다.

어쨌든 그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며,
그와 그녀가 각자 키워가는 이 새로운 99%의 사랑이 오히려
과거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증명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Realistic 99% Love.

어느덧 30대의 중반을 넘긴 그는 이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자신을 키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줄여 나가는 게 아닌가 하고 말한다.
그는 요즘 자신을 줄이고 줄여서 언젠가 하나의 점이 되고 싶다고도 했다.

그리곤 그렇게 된다면 그때쯤에서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도 같다며
조용히 읊조리곤 굳게 입을 다문다.

*

오늘은 2007년 3월14일.
화이트 데이이고, 모두들 사랑을 이야기한다.
자신만의 것을 찾기위해서 노력하는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마도 세상에서 유일하고도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 될 수있었던
어떤 존재를 잃어버린 한 사내의 추억이든,
100% Surreal Love에 대한 환상이든 말이다.

그와 작별하고 까페를 나서자
문득 오늘 나를 내려다보는 달이 초생달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늘을 올려다 보지는 않았다.

[ 그림.신근주 그리고  글.아키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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